임대인 A 씨는 최근 근심이 늘고 있다. 상가 세입자와 1년 넘게 이어진 퇴거 분쟁 끝에 지난달 '명도합의서'를 작성하며 겨우 마무리 하는 듯했으나, 세입자 B씨가 돌연 "이사 갈 곳을 아직도 구하지 못했다"며 합의 이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합의서에는 '특정 날짜까지 비워주지 않을 시 모든 법적 책임을 진다'는 문구와 인감증명서까지 첨부됐지만, 결국 A 씨는 다시 법원을 찾아 명도소송을 제기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임대차 분쟁 현장에서 임대인과 임차인이 퇴거에 동의하며 작성하는 '명도합의서'가 실제 분쟁 해결에는 무용지물이 되는 사례가 잇따르고 있다. 겉보기에는 임차인이 자발적으로 퇴거에 동의하고 서면까지 남긴 완결된 형태지만, 실무적으로는 이 합의서가 강제 집행력을 갖지 못한다는 법적 맹점 때문이다.
서류는 '완성', 현장은 '진행 중'... 합의서 법적 한계
법조계에 따르면 명도합의서는 그 자체로 '판결문'과 같은 집행 권원을 갖지 못한다. 즉, 세입자가 합의된 날짜에 나가지 않겠다고 버틸 경우, 임대인이 합의서를 근거로 사설 용역을 동원해 짐을 빼거나 자물쇠를 교체하는 행위는 오히려 '방실수색죄'나 '업무방해죄' 등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결국 합의 위반 상황에서 임대인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합법적 수단은 다시 '명도소송'을 제기하는 것뿐이다. 합의서를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송을 통해 판결문을 받아야만 비로소 국가 공권력을 빌려 강제집행을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시간적·경제적 손실은 고스란히 임대인의 몫이 된다.
전문가들은 명도합의서가 소송에서 유리한 증거 자료는 될 수 있지만, 분쟁의 즉각적인 종결책은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특히 임차인이 합의 당시 심신미약 상태였다거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작성됐다는 점, 혹은 합의 내용이 임차인에게 일방적으로 불리한 '부속물 매수청구권 포기' 등 강행규정 위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면 법정에서 합의 자체가 무효가 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제소전 화해' 없는 합의는 반쪽짜리
명도 분쟁을 현장에서 다루는 부동산 전문 변호사들은 합의서 작성 단계에서 반드시 '제소전 화해' 절차를 병행할 것을 권고한다. 제소전 화해란 소송을 제기하기 전 판사 앞에서 양측이 합의를 확정 짓는 절차로, 법원의 화해조서가 작성되면 대법원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다.
하지만 제소전 화해는 신청부터 확정까지 통상 3~6개월의 시간이 소요되며 비용이 발생한다는 점 때문에 현장에서는 기피되는 경향이 있다. 당장 갈등을 봉합하고 싶은 마음에 당사자 간의 '종이 합의'에만 의존하다 보니, 세입자의 변심이라는 암초를 만났을 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임대차 시장에서는 권리금 분쟁이나 영업 손실보상 등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복잡해지면서, 명도합의서 작성 이후에도 '조건부 이행'을 내세우며 버티는 임차인들이 늘고 있다. "합의금 액수가 생각보다 적다"거나 "다음 임차인과의 계약 사실을 알고 몸값을 높이려는" 전략적인 버티기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법적 효력 꼼꼼히 따져야 분쟁 되풀이 방지"
전문가들은 명도합의서를 작성할 때 단순히 '언제까지 비운다'는 내용뿐만 아니라, 시점을 명확히 특정하고 미이행 시 발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손해배상액을 명시해 심리적 압박을 가하는 것이 차선책이 될 수 있다고 조언한다. 또한 합의 과정에서 임차인의 진정한 의사를 확인하는 녹취나 영상 기록을 남겨두는 것도 추후 소송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는 방법이다.
부동산 전문 엄정숙 변호사는 “명도합의서가 분쟁을 끝내지 못하는 가장 흔한 이유는 퇴거 시점이 법적으로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인도 기한이 빠진 합의서는 약속처럼 보일 뿐, 위반 여부를 가르는 기준선이 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명도는 의사의 문제가 아니라 시점이 특정된 행위의 문제”라며 “언제까지 비워야 하는지가 빠진 상태에서는, 임차인이 계속 점유하더라도 곧바로 채무불이행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시점, 즉 퇴거 날짜가 특정되지 않으면 분쟁의 기준선이 사라지고, 집행권원이 없으면 강제력 자체가 없다”며 “퇴거 날짜를 특정하고, 그 합의를 집행권원으로 연결할 수 있는 설계까지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임대인은 다시 소송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스스로 열어두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엄 변호사는 “무엇보다 퇴거 날짜를 특정하고, 그 합의를 집행권원으로 연결할 수 있는 설계까지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임대인은 다시 소송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스스로 열어두는 셈”이라며 “실제 퇴거를 강제하려면 제소전화해조서, 조정조서, 또는 명도 판결문과 같은 집행권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임대차 분쟁의 평화로운 해결을 위해서는 합의서라는 문서 뒤에 숨은 실무적 절차와 법적 한계를 정확히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합의'라는 이름의 또 다른 소송이 시작되지 않도록 임대인과 임차인 모두가 법적 실효성을 따져보는 신중함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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