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선 사라지면 위반도 흐려져… ‘합의 위반시점’ 입증 막혀
날짜 있어도 집행은 별개…“명도합의서로는 강제퇴거 안된다”
임대차 분쟁 현장에서 명도합의서를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명도소송으로 이어지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임차인이 퇴거에 동의했고, 서면까지 남겨둔 상태지만, 실무에서는 이 합의서가 분쟁을 종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핵심 원인은 두 가지다. 먼저 인도 날짜가 특정되지 않은 합의 다른 하나는 집행력이 없는 문서라는 구조적 한계다.
15일 엄정숙 변호사는 “명도합의서가 분쟁을 끝내지 못하는 가장 흔한 이유는 퇴거 시점이 법적으로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인도 기한이 빠진 합의서는 약속처럼 보일 뿐, 위반 여부를 가르는 기준선이 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실무에서 자주 사용되는 표현은 ‘조속히 퇴거한다’, ‘정리되는 대로 인도한다’, ‘빠른 시일 내 명도한다’와 같은 문구다. 당사자 사이에서는 충분한 합의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분쟁으로 넘어가는 순간에는 될 결정적인 약점이 된다. 왜냐면 인도 시점이 특정되지 않아 임차인의 점유가 언제부터 ‘위반’이 되는지 자체가 불명확해지기 때문이다.
엄 변호사는 “명도는 의사 문제가 아니라 시점이 특정된 행위 문제”라며 “언제까지 비워야 하는지가 빠진 상태에서는, 임차인이 계속 점유하더라도 곧바로 채무불이행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다만, 인도 날짜를 특정했다고 해서 곧바로 강제퇴거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명도합의서는 그 자체로는 집행력이 없는 사적 합의 문서에 불과하다. 임차인이 합의를 어기고 버틸 경우, 임대인은 해당 합의서를 근거로 바로 강제집행을 할 수 없다.
엄정숙 변호사는 “인도 날짜가 명확히 적혀 있더라도, 명도합의서만으로는 집행이 되지 않는다”며 “실제 퇴거를 강제하려면 제소전화해조서, 조정조서, 또는 명도 판결문과 같은 집행권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문제는 인도 날짜가 특정되지 않은 명도합의서의 경우, 이후 집행권원을 확보하는 과정에서도 추가적인 혼선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임차인이 “아직 정리 중”이라거나 “곧 나갈 예정”이라고 주장하면, 합의 위반 시점 자체가 불명확해져 명도소송에서도 기준일 설정과 손해 산정이 흔들릴 수 있다.
엄 변호사는 “명도합의서에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언제까지 인도한다’는 간단한 내용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며 “날짜가 특정되지 않으면 분쟁의 기준선이 사라지고, 집행권원이 없으면 강제력 자체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어 “명도합의는 형식이 아니라 구조의 문제”라며 “퇴거 날짜를 특정하고, 그 합의를 집행권원으로 연결할 수 있는 설계까지 함께 고민하지 않으면, 임대인은 다시 소송으로 돌아올 가능성을 스스로 열어두는 셈”이라고 덧붙였다.
명도 분쟁은 합의 여부보다 합의의 내용과 그 이후 절차 설계가 결과를 좌우한다. 퇴거 의사가 확인됐다는 이유만으로 안심하기보다, 인도 기한이 특정됐는지, 그리고 집행력 있는 문서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인지을 함께 점검하는 것이 실무에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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